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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고시앙(Négociant)과 에트랑제(Étranger)
프랑스에 살면서 흔히 듣는 질문 중에 ‘공부 마치면 프랑스에 남겠냐’라는 게 있다.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아쉬워한다.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똘레랑스(tolérance)의 나라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외국인으로서 일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2002년 봄에 진행된 프랑스 대선에서 ‘외국인을 몰아내자’고 주장했던 극우파 국민전선당의 장 마리 르펜(Jean-Marie Le Pen)이 결선투표에 오르는 경우도 프랑스에 정착하려는 외국인들을 불안하게 하는 일이다. 또한 까다롭고 복잡한 노동법과 노동비자를 얻기 위한 수많은 절차들은 외국인이 정착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초기 와인을 둘러싼 포도밭의 역사도 그랬다. 1930년대 유럽은 경제적 위기를 맞았고 폴란드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동유럽에 살던 이들은 자신의 고국을 버리고 프랑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와인 주요 산지 가운데 하나인 부르고뉴에서 받아들인 첫 대규모의 외국인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주로 포도밭에서 일했다. 현지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묵묵히 견뎌내며 피나는 노력 끝에 새가 둥지를 틀 듯 정착해 갔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이들의 후손들은 와인 양조업자가 되어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1세대들이 철인처럼 일해온 결실인 것이다. 또한 사회적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외국자본이 들어오는 등 많은 도맨과 샤또들이 외국인들에게 양팔을 벌리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활발한 분야가 바로 네고시앙이다. 와인 무역을 위해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이들이 이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대열에는 한국인도 들어있다.
«저는 원래 프랑스에 사진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이곳에 살면서 점차 와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처음 접해 본 와인은 색다른 충격이었어요. 이곳 문화와 우리나라의 주류 문화를 비교하게 되었죠. 그러고는 우리나라에도 뭔가 다른 주류문화를 소개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와인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박재화 씨. 그는 남편 나카다 코지(Nakada Koji) 씨와 함께 ‘루 뒤몽(Lou Dumont)’이라는 회사를 이끌어가는 네고시앙이다. 네고시앙은 한마디로 와인 전문 중간 상인이다. 이들의 역할과 영역은 보다 더 넓고 다양해서 부르는 지칭도 여러 가지다. 부르고뉴 지방에서 말하는 네고시앙은 보통 네고스-엘르버(Négoce-éleveur)를 뜻한다. 포도밭 주인들은 포도를 수확해서 압착한 포도 즙이나 발효가 끝난 와인을 오크 통째로 네고시앙에게 넘긴다. 네고시앙은 이 와인을 숙성시키고 병에 담아 자신의 마크를 달고 판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우처럼, 원작에 나오는 인물과 자신의 개성을 조화시켜 새로운 인물로 재창조해내는, 그런 역할이다. 박재화 씨가 운영하는 루 뒤몽은 네고스-엘르버와 함께 일본이나 한국에서 고객이 요구하는 와인을 중간 거래해 주는 순수한 중간 도매 모두를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애정을 갖고 노력을 기울이는 일은 아무래도 네고스-엘르버 쪽이다. 실제로 이곳 네고시앙들이 지역 와인 산업에 기여한 바는 엄청나다. 부르고뉴를 예로 들면 와인 수출의 51퍼센트가량을 이들이 맡고 있다. 파트리아쉬(Patriache), 조르주 뒤 뵈프 (George Duboeuf), 장-끌로드 부아쎄(Jean-Claude Boisset),루이 자도(Louis Jadot), 그리고 루이 라뚜르(Louis Latour) 같은 유명한 네고시앙들가운데 대부분은 아주 오래전부터 몇 세기에 걸쳐 막대한 자본을 들여 이룩해놓은 것들이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과 마케팅 방식을 도입하여 부르고뉴 와인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해왔다.
이들의 활약 뒤에는 전통과 가문을 위시해 비밀스럽게 운영하는 방식이 그늘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들 부르주아 집안들은 상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끼리의 정략결혼을 하는가 하면 외부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모습을 보인다. 가난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해 지금은 부르고뉴 최고의 네고시앙이 된 장 끌로드 부아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누군가 가문이 없다면 바로 그가 가문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며 그들의 혈통주의를 꼬집었다. 이처럼 완고한 분위기에서 재화 씨 부부가 융화되기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이들을 막고 있던 벽은 외국인 그것도 동양인이라는 편견이었다.
나카다 씨는 프랑스 사람들의 열린듯하면서도 닫힌듯한 기질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들은 나카다 씨를 알고자 노력도 하지 않고 ‘돈 많은 일본인’쯤으로 지레짐작하며 그를 대했다고 한다. 이 부부는 프랑스 와인 전문학교 CFPPA에서 와인 국제무역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받은 재원들이다. 하지만 실력도 텃새 앞에서는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어느 유명한 도멘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출신의 레지세르(régisseur) 이야기였다. 그는 ‘땅이나 유산, 계급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이들과 친구가 되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토로했다. 그렇다면 박재화 씨 부부가 네고시앙으로서 이곳에 정착하는 건 무모한 일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저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이 됐던 거래가 있습니다. 일본 시세이도에서 제안이 들어왔어요. 와인을 주문하고 싶은데 부르고뉴산 와인을 사고 싶지만 병은 젊은 층을 겨냥한 색다른 병을 쓰고 싶다고요. 그래서 몇몇 네고시앙에게 제안했는데 거절당했다고요. 저희가 이 일을 맡기로 하고 추진했습니다. 와인은 부르고뉴 특유의 우아하고 중후한 와인을 셀렉션 하고 병은 마치 향수병 같은 독일의 와인병을 샀습니다. 분명 프랑스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수 있어요. 특히 부르고뉴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보수적인 경향이 강해요. 그래서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갔을 거예요. 아마 안동 전통 소주를 캔에 담아 파는 것과 같은 충격일 거예요. 하지만 일본인들의 정서에는 맞았나 봅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지요. 결국 고객의 요구에 충실히 답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지역신문 비앙 퓌블릭(BienPublic)에서는 이들의 시도를 두고 ‘가장 아름다운 결과물’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회사 루 뒤몽을 두고 한병의 와인으로 비유한 그들의 평가를 더 들어보자.
«이 와인은 한국, 일본 그리고 프랑스를 모두 아썽블라주(Assemblage; 두 개 이상의 포도품종을 적당한 비율로 섞는 일) 해서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뭐 중요한가? 이미 이 와인은 오래 숙성시켜도 좋을 만큼 좋은 상태로 잘 출발한 듯싶은데…»
이 자그마한 동양인들을 에트랑제(Étranger; 외국인)가 아니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박재화씨의 사무실이 있는 즈브레 샹베르땅(Gevrey-Chambertin) 마을에는 하루에도 수십 개의 네고시앙 회사들이 문을 열고 또 문을 닫는다. 아직도 이들이 가야 할 길은 멀지만 포부는 힘차다. 지금은 일부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는 중요한 네고시앙&도멘으로 자리 잡았다.
글 : 비노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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