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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RGOGNE EXPERIENCE
 

2편 : 부르고뉴 와인의 역사 (5단계)

BOURGOGNE EXPERIENCE

#2. 부르고뉴 와인의 역사 (5단계)

 

 

 

부르고뉴 와인의 역사는 고대시대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과 로마 사람에 의해서 정착, 발전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곳 부르고뉴 지방까지 포도나무를 심게 되었으며,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을까? 많은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은 포도나무의 첫 경작에 대해서 지금도 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부르고뉴 와인은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를 거쳐 발전, 계승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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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셀러에서 와인을 마시는 수도승, 19세기 말-20세기 초, 작자 미상 Continental school / Public domain]


[1. 수도승들의 와인 : 부르고뉴 와인의 요람, 수도원]


부르고뉴의 포도원과 와인이 본격적으로 질서와 안정을 잡아가며 확고한 토대를 차지하게 된 건 중세 수도승들에 의해서다. 부르고뉴 와인의 요람은 끌뤼니(Cluny)와 시토(Cîteaux) 교파에 의해서 발전되어간다.


587년 부르군트 왕국의 왕 곤트라누스 1세(Gontran I de Bourgogne)는 현재 디종(Dijon)에 위치한 쌩-베니뉴 성당(Cathédrale Saint-Bénigne de Dijon)에 포도원을 헌사 했다. 이후 640년에는 즈브레(Gevrey) 마을에 위치한 베즈(Bèze) 포도원을 선사한다. 이곳이 지금의 그 유명한 샹베르땅-끌로 드 베즈 그랑 크뤼(Chambertin-Clos de Bèze Grand Cru) 포도원이다. 당시의 포도원은 수도원들의 정신적인 메시지와도 같았다. 와인은 미사주로 사용되었으며 환대와 접대에도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 교구의 재정을 채우는 데에도 필요했다. 수도승들은 땅을 경작하고 와인을 생산하는데 주력했으며 계속된 증여와 기부로 포도원의 면적은 늘어갔다. 이들은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드는 노하우를 다음 세대에 전수해 주었다. 또한 수사들은 교황, 왕, 대주교에게 선물로 줄 최고급 와인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좋은 포도와 함께 좋은 산지가 지목되었고 이때부터 산지(Appellation)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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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2세 드 부르고뉴 공작(Philip the Bold), 16세기 작자 미상 Palace of Versailles / Public domain]


[2. 군주의 와인]


수도승들이 발전시킨 와인은 이후 발루아(Valois)나 아르디(Hardi) 같은 권세 있는 군주들이 포도원을 소유하게 되면서 부르고뉴의 와인산업은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종교사회에서 민간 사회로 무대를 옮기게 된 것이다. 수도승들의 와인이 교회에 머물러 있었다면 군주들의 부르고뉴 와인은 본격적으로 바깥세상에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와인의 품질을 높이고 수출에 적합한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등 소비자들에게 열려있는 생산을 추구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외에서 개최되는 수많은 연회나 만찬에 부르고뉴 와인을 알리는데 주력한다.


당시의 강력한 권력의 군주들이 지배하던 부르고뉴 공국은 오늘날 부르고뉴 주민들이 잊지 못하는 영광의 시대였다. 부르고뉴 공국의 군주는 현재의 네덜란드 지역까지 소유하고 있었고 15세기 들어 유럽 대륙에서 가장 번영을 구가하던 나라였다. 이렇듯 세력이 강한 부르고뉴 공국과 함께 고품질의 와인을 통해 부르고뉴 와인은 부흥의 서막을 화려하게 밝히고 있었다.


당시 가장 권력 있던 샤를 1세 드 부르고뉴(Charles le Téméraire)의 사망으로 인해 프랑스 왕인 루이 11세의 통치하에 들어가면서 프랑스로 합쳐지게 되며 부르고뉴 와인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3. 광명의 와인]


군주의 시대가 끝난 뒤 15세기와 17세기 사이 부르고뉴는 훌륭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시대에서는 보다 실질적인 행동과 과학, 그리고 철학, 합리성들이 부르고뉴 와인의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난다. 와인의 향과 맛을 표현하는 어휘들이 등장하며 크뤼(cru)나 밀레짐(millésime)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대에 병이 발명되며 생산자들은 자신을 표현하는 라벨을 제작하기 시작하는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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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고시앙, collection privée / Public domain]


[4. 네고시앙(négociant)의 와인]


부르고뉴 와인에 있어서 19세기는 커다란 도약과 성공을 거둔 시대이다. 이 시대는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시작해서 1914년 1차 대전 발발 까지를 의미한다. 프랑스 혁명은 와인산업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줬다. 혁명을 통해 유복한 포도재배자와 유산계급들에게 포도원(토지)의 재분배가 이루어졌다. 교회가 소유한 포도원들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교회가 소유했던 포도밭은 전부 몰수되었고 국유화한 뒤 재분배 과정을 거쳤는데 이때 그랑 크뤼 포도밭들은 파리의 재력가나 뉘(Nuits) 지역의 유산계급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소유주의 이전 과정에서 포도밭은 크게 팽창하게 되었다. 19세기까지 꼬뜨 도르(Côte d’Or) 지역의 총 포도원 면적은 10,500헥타르에 지나지 않았으나 1880년에는 23,000헥타르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철도의 건설로 이동과 수송의 시간과 노력이 절감되면서 자유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며 부르고뉴 와인은 또 다른 부흥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감은 19세기 말 “필록세라(phyloxera)”라는 비극과 함께 막을 내렸다. 미국에서 온 조그마한 진딧물인 필록세라는 1865년 프랑스 남부의 갸흐(Gard)라는 지역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프랑스 전역을 황폐화 시켰고 이곳 부르고뉴는 1878년 처음 뫼르소에서 발견되었다. 이듬해에는 부르고뉴 지역의 15개 마을이 전염되었고 1886년에는 거의 부르고뉴 전역이 필록세라 피해를 입게 된다. 포도원은 황폐화되어가는데 경제도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며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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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포도재배자의 와인]


1888년에 생산자들은 미국종 접본에 유럽종을 접목하는 것이 필록세라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포도밭을 새로이 일구어 나갔다. 안정적으로 포도밭 면적은 늘어갔고 당시까지만 해도 소규모 포도 재배자들보다 여전히 네고시앙의 힘이 컸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소규모 포도 재배자들은 커다란 네고시앙에게 자신들이 재배하고 만든 와인을 판매하였다. 1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토지 가격은 하락하고 작은 도멘의 와인을 사는 커다란 네고시앙의 수가 줄어들면서 하나둘씩 소규모의 도멘들은 문을 닫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때 지금의 유명한 도멘들은 문을 닫는 도멘들을 하나씩 사들이며 축적된 노하우로 와인의 품질을 높여가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생산자들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은 생존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만들었고 이때 보르도(Bordeaux)의 생산자(네고시앙, 중개업을 통해 판매, 선물거래)들과는 달리 “직접 판매(la vente direct)” 방식을 도입하게 되었다. 직접 손님들을 찾아 나서는 방식으로 소비자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했으며 그 결과로 1930년대 말부터 부르고뉴 도멘의 와인들이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렇듯 도멘의 와인들이 높은 품질과 함께 인기까지 얻으며 부르고뉴 와인시장은 네고시앙과 도멘 소유주들이 어깨를 나란히 경쟁하는 시대가 왔다. 몇 개의 네고시앙에 집중되지 않고 직접 와인을 만들어내는 도멘의 등장으로 지금의 부르고뉴 와인의 다양성, 즉 각 크뤼의 다양성과 개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 예로 50헥타르의 그랑 크뤼 포도원, 끌로 드 부조(Clos de Vougeot)는 그 안에 80여 명의 다른 소유주가 있어 80여 개의 다른 맛을 가진 끌로 드 부조 와인이 존재하는데, 부르고뉴 다양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부르고뉴 와인들은 처음 수도승들이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군주의 시대에 대외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과학과 철학의 발달과 함께 품질을 높이며 혁명으로 인한 재분배와 함께 네고시앙이 부각되는 시대를 맞았으며 마지막으로 소규모의 고품질 와인을 만들어내는 도멘의 등장으로 5단계를 거쳐 현재의 부르고뉴 와인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높은 품질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다양성이 와인 애호가들이 부르고뉴 와인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글 : 비노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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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Vinocus]
부르고뉴는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복합적이며 가장 까다로운 명산지이다.
(CLIVE COATES, MW)
최근 들어 부르고뉴 애호가를 접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부르고뉴’ 와인을 마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마실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아니면 모처럼 기회에 구매한 와인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은데 그만큼 정보나 지식이 따라주지 못해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부르고뉴는 단일 품종을 사용하여 와인을 만들지만 마을 별, 끌리마 별, 크뤼에 따라 다양한 맛을 드러낸다. 끌리마(Climat)만 하더라도 부르고뉴에는 1,240여 개가 존재한다. 부르고뉴 와인이 다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다양한 떼루아가 존재한다. 부르고뉴는 떼루아의 산지다. 토양, 기후 그리고 인간의 상호 유기적 영향과 이들의 조합이 이루어져 부르고뉴 와인의 개성을 만든다. 그러므로 부르고뉴 와인을 즐긴다는 건 곧 그만큼 부르고뉴의 기후, 토양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

“부르고뉴 익스피리언스”에서는 부르고뉴의 모든 것을 소비자의 시각으로 기획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담아냈다. 부르고뉴 지식을 참고하여 자신에게 맞는 와인을 제대로 골라보자. 또한 이 시리즈는 초보자를 대상으로 썼기에 조금 어려운 부분은 뒤로 미루어도 괜찮다. “이런 세계가 있구나!”하는 마음으로 읽어 나가 보자. 깊고도 넓은 부르고뉴 월드에 오신 걸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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