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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졸레 누보 2020] "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 그건 한 편의 시예요 ! "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요? 15년 전 덴마크에 갔던 일이죠. 그때 보졸레 누보 축제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조르주(George) 씨는 기억을 되살리며 유쾌하게 대답했다. 은퇴한 포도재배기술자로 열 살 무렵부터 일을 하기 시작하며 포도농사밖에 모르는 농사꾼이다. 포도 즙으로 검게 물든 투박한 손을 보고 그 세월만큼 사연도 많겠다 싶어 물어본 것이었다. 15년 전 그는 자신이 만든 보졸레 누보를 팔기 위해 덴마크로 건너갔었던 때를 내게 들려주었다. 보졸레 누보를 마시기 위해 수천 명의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웃고 떠드는 소리에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름도 모르는 이들과 함께 어우러져 잔을 기울이고 함께 춤추며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며 아직도 즐거워하며 말했다. 처음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저 시골 사람의 외국 기행 정도겠거니 생각했지만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결국 그가 정성껏 양조한 와인에 대한 인정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축제꾼들과 이방인의 우연한 만남, 이 만남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보졸레 누보’라는 매력적인 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이 되면 이 햇 포도주는 세계 각지로 흘러들어가 보졸레 누보라는 긴 강물을 이룬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보졸레 지역에서 생산되는 햇 포도주를 말한다. 뱅 누보(Vin Nouveau), 즉 새로이 만든 와인이라는 뜻의 누보 와인은 보졸레 말고도 다른 여러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다. 프랑스만 해도 꼬뜨 뒤 론(Côtes-du-Rhône), 앙주(Anjou), 뚜렌(Touraine), 가이약(Gaillac), 부르고뉴(Bourgogne), 마꽁(Mâcon) 같은 지역에서 갓 수확한 포도로 오랜 숙성이 필요 없는, 가볍고 신선한 햇포도주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와인이 바로 보졸레 누보다. 이 와인은 전 세계 150여 개국에 약 2천5 백만 병(국내외 모두 판매되는 양은 6천만 병)이 팔리고 있어 프랑스 포도시장에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 주는 와인이다. 보졸레 누보 와인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마케팅 작품’이라 칭찬할만한 보졸레 지역 와인 생산업자들의 뛰어난 마케팅을 꼽을 수 있다. 그 유명한 문구 ‘보졸레 와인이 막 도착했습니다(Le Beaujolais nouveau est arrivé)’ 이 간결하고도 명백한 문구를 앞세워 전 세계 소비자들이 11월 셋째 주 목요일 0시를 기다리도록 붙잡아 두었다. 보졸레 누보가 상업적으로 성공을 얻고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을 수 있도록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들 가운데 ‘조르주 뒤뵈프(Georges Duboeuf)’라는 양조자가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초기에는 11월 14일이 되면 로마네슈(Romanèche)에 있는 우리 집에서 아주 작은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때는 트럭 15대에다 술을 담고는 20명가량의 사람들이 모여서 조용하게 진행되었어요. 이렇게 시작한 축제가 아주 빠르게 커져갔습니다. 7-80년대가 절정이었죠. 유명한 수석 요리사, 배우들, 여러 언론인들이 우리 곁에 모였습니다. 어떤 것도 따라갈 수 없는 이 와인의 맛을 음미하기 위하여..”
과일향이 나는 순한 맛 보졸레 누보는 사실 오래 숙성시킨 품질 좋은 와인과는 거리가 멀다. 50년대 초까지만 해도 리옹(Lyon)과 보졸레 인근 마을에 자리한 작은 술집이나 값싼 레스토랑에서 서민들의 목을 축여주었던 막 포도주였다. 그러던 것이 양조기술이 발달하면서 독창적인 양조법을 찾아내었다. “원래는 부르고뉴처럼 풀라주(Foulage; 포도 즙의 발효를 순조롭게 하기 위해 포도송이를 가볍게 압착하는 방식)방식을 시행했었죠. 그러다가 보졸레 누보 판로가 터지고 와인 시장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우리 식에 맞는 독자적인 길을 찾아갔습니다.” 보졸레 누보 식의 양조법이란 엉뀌바주(Encuvage; 양조통에 담는 과정)와 마쎄라시옹 꺄르보니끄(Macération Carbonique; 탄산 침용) 방식을 말한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선 포도송이를 압착하지 않고 송이째 이산화탄소가 가득한 양조통에 담아 발효시킨다. 껍질이 찢어지면서 다량의 탄닌 성분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압착하지 않고 껍질 안에서 과육만 발효가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조통에 담궈두는 침용 기간도 일주일씩 걸리는 레드와인과는 달리 4-5일 정도밖에 안 걸린다. 짧은 기간 역시 탄닌 성분의 떫은맛을 피하기 위함이다. 과육 안에 들어있는 과일향은 듬뿍 발산하되 탄닌의 강한 맛은 절제하는 보졸레 누보식의 와인.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파트너는 갸메(Gamay)라는 포도품종이다.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이들의 궁합(?)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보통 레드와인 포도 품종들은 보졸레 지방의 화강암 토양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런데 갸메 품종은 오히려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갸메로 만든 와인은 아주 좋은 개성을 드러낸다. 신선하고 생기가 넘치며 원기왕성하고 과일향이 강하다. 여기에다 보졸레 양조자들은 탄산 침용이라는 아주 놀라운 기술을 이용하면서 갸메의 개성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렇게 탄생한 햇 포도주는 신선하고 순한 맛이 느껴져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와인을 모르는 초보자일지라도 어려움 없이 즐길 수 있는 와인이 바로 보졸레 누보다. 세계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가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맛의 개성 때문이다.
[보졸레 누보 축제 ‘레 싸르망뗄 드 보주’]
[싸르망뗄 행사에서 불붙은 포도나무 가지를 실은 손수레 (credit: Progrès, Maxime JEGAT)]
축제의 와인 보졸레 누보는 이 와인을 마시기 위해 함께 모이는 즐거움이 있기에 축제의 향을 뿜는다고 말한다. 보졸레 누보와 축제,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축제의 형태도 가지각색이다. 변두리 술집의 소박한 축제에서부터 호텔에서 열리는 크고 화려한 축제까지. 모두 장소도 다르고 규모도 다르지만 프랑스인들이 느끼는 보졸레 누보에 대한 정서는 비슷하다. 그 이름 안에는 과거와 시골, 고향에 대한 향수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건 마치 우리가 한가위 하면 송편이나 시골집 밤하늘에 뜬 보름달을 떠올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보졸레 지방의 축제를 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누보가 출시되는 날을 기준으로 120여 개의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린다. 그중 가장 큰 축제는 보주(Beaujeu) 마을에서 열리는 싸르망뗄(Sarmentelle)축제이다. 이 축제는 불붙은 포도나무 가지를 실은 손수레 행렬로 유명하다. 그래서 포도나무 가지라는 뜻의 싸르망(Sarment)에서 이름을 따서 축제 이름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축제가 열리는 날, 그러니까 보졸레 누보가 나오는 11월 셋째 주 목요일에는 전 세계 오천여 명의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햇 포도주의 도착을 축하한다. 가장 순수한 전통이 남아있는 축제라 자부하는 싸르망뗄 축제는 올해로 32번째다. 보졸레 누보의 정신이 담긴 싸르망뗄 축제에 미리 가보자. 11월 셋째 주 수요일 오후 다섯시, 시청 앞에서 열리는 와인 시음 행사부터 축제는 시작한다. 이후 다양한 공연들의 볼거리와 오케스트라 공연들이 이어진다. 음식과 함께 준비한 보졸레 와인을 시음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행사다. 이제 11시 15분, 이때 보졸레 농민들은 역 광장에 서서히 모인다. 그리고 포도나무 가지에 불을 붙여 주변을 환히 밝힌 다음, 불붙은 가지들을 손수레에 싣는 의식이 진행될 것이다. 이 의식은 한 해 동안 포도 경작에 힘써온 농사꾼들에게 명예를 돌리기 위해 내려온 전통이라고 한다. 이들 손수레 행렬은 성당 앞 광장을 향하여 천천히 걷고 관광객들은 그 뒤를 따른다. 드디어 0시, 하늘에서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보졸레 누보 에 따리베(Beaujolais Nouveau est arrivé)’라는 함성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온 모든 이들에게 햇 포도주를 따라주고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된다.
[credit: 보졸레 와인 협회(Inter Beaujolais)]
올해 보졸레 누보 올해 보졸레 누보는 어떤 맛일까? 와인 맛을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다. 하지만 한해 날씨와 포도 경작 일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2020년은 와인 업계를 비롯한 모든 분야의 사람들에게 전례 없는 한 해였다. 포도의 성숙도 측정이 자리 잡은 1992년 이후 2003년 다음으로 2번째로 빠르게 수확했고, 가뭄 등의 기후 조건으로 “극한의 빈티지”라고 평가할 수 있다. 포도나무는 이런 상황에서도 적응하고 빈티지에 맞섰다. 보졸레 지역의 포도나무들은 가뭄에 시달렸지만 건강 상태는 매우 좋았다. 다시 한번 갸메 품종은 기후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개별 생산자들은 그들의 고도, 경사면, 와인 철학에 의해 수확 시기를 결정할 수 있는데 올해 포도가 일찍 성숙하여 2020년 최소 의무 수확 개시일인 8월 20일까지 빠르게 와인셀러에서 수확한 포도를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보졸레는 샴페인 지역과 더불어 가장 손으로 많이 수확하는 지역으로 올해 메이커들은 25,000명의 수확 인력과 함께 최고의 조건으로 수확을 해야 했었고 이는 평년보다 두 배 이상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의미했다. 수량 측면으로 봤을 때 2020년도 수확량은 최근 평균보다 적은 편이었다. 품질 측면에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한 해였다. 좋은 균형감과 뛰어난 신선함이 돋보였다. 보졸레 지역의 생산자들은 자연에 맞서 그들의 노하우로 잘 적응해나갔다. 처음 테이스팅 한 와인으로 보면 크리스피 한 질감이 살아있고 쉽게 마시기 좋은 스타일이며 신선함과 성숙도가 매력적이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인 내일, 올해도 보졸레 누보는 우리 곁에 찾아올 것이다. 열기가 가득 찬 비스트로(작은 술집)에서 한 잔 기울이는 파리지엥들에게도, 보주의 작은 언덕을 찾아온 순례자들에게도, 그리고 작은 축제가 열리는 곳곳에서 그들은 함께 마시며 나누고 즐거워할 것이다.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듯이 한 잔의 보졸레 누보를 음미할 것이다. 짧은 시구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의미를 준다. 그게 바로 시가 가진 자유로움이다.
글 : 비노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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